작가 이름이 낯익어 인터넷 헌책방에서 골라봤다. 책 페이지가 다 누런색인데다 출판사 이메일 자리에 하이텔과 천리안 아이디가 게재되어 있어 보는 순간 추억이 왈칵 했다.
99년도 작이니 그 당시에는 아마도 천리안을 다들 많이 이용했던 것 같다. 본문내용에는 삐삐치는 내용도 있으니 그냥 그 단어만 봐도 미소가 지어진다. 하지만 소설의 내용은 전혀 오래된 흔적을 엿볼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재미도 있다.
주인공 박경진은 변호사 남편이 바람이 난 걸 알고 이혼을 결정하지만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악착같이 재산을 더 빼돌린다거나 하지 않고 얘만 자기가 데려가겠다며 아주 고상하게 마무리 짓는다. 그녀의 직업은 그런 고상함을 대표하는 큐레이터라 남들이 본다면 더 그렇게 보였을 터이다. 하지만 그녀는 내재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할지 주체하지 못한다. 이혼해 다른 남자들과 자유로이 연애도 하고 아이는 남의 집에 매일 맡겨두며 자신의 일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심이다.
그런 그녀에게 어느 남자가 자신의 집으로 흘러 들어온다. 이름이 뭔지 직업이 뭔지 무슨 사정으로 집으로 가지 못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할 일들을 해나간다. 그 남자는 자신의 아이에게 자상하고 집안도 깔끔하게 정리해 줄 뿐 아니라 그녀가 한편으론 기대고픈 맘이 들게도 한다.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에게 왠지 화가 난다. 남자의 사연을 모두 알고 난 뒤에는 더 화가 나는데 어찌 보면 둘이 닮은 구석이 많음을 그녀가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. 누군가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곳을 찾아다니고 더군다나 그림그리기의 꿈마저 자제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지 않나 싶다.
사실 그 남자는 소설 시작부터 끝까지 신비주의로 남겨져 있다. 말수가 없고 자신의 처지를 밝히지도 않고 그저 아이에게 함박웃음을 안겨주지만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 모습은 저곳에서 뛰어내릴 듯 한 불안감을 안겨준다. 하지만 그도 그녀가 자신의 처지와 닮았음을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. 불안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.....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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